마닐라에서 비행기 탑승 직전 태풍을 만났을 때

필리핀에 워낙 자주 여행을 가다 보니 이따금 태풍의 흔적을 보게 되는 날들이 있었다. 대개 태풍이 지나간 이후였는데, 마닐라 대부분이 정전이 되었다던지 숙박하기로 한 친구 거실 유리창이 없어 뻥 뚫려있었다던지.. 그런 인상적인 경험에 이은 또 하나의 태풍을 올 여름 휴가에서 겪었다.

마닐라 터미널3 앞의 리조트 월드 마닐라에서 유유자적 몇 시간을 보내고 저녁을 먹던 중, 탑승 예정 항공사인 에어 아시아로부터의 문자를 보게 되었다. 비행기가 예정보다 늦게 출발할 수도 있다는 내용이었다. 식사를 마칠 때쯤 와이파이로 접속해 메일 확인을 해보니, 결국 비행기 캔슬 안내 메일이 도착해 있었다. 알고보니 우리 비행기의 출발 시각은 거의 새벽 3시인데, 아침 7~8시경 태풍 람마순이 마닐라를 관통한다고 했다.

우리는 태풍이 온다는 뉴스도 모르고 있었던데다, 리조트 월드 마닐라가 실내인지라 비가 얼마나 오는지도 전혀 감을 잡지 못하고 있었다. 이 와중에 비행기 캔슬이라니, 어떻게 대처해야할까 당황스러웠다.

저가 항공에 자연재해면 항공사에서 기껏해야 해주는 건 다음날로 비행 좌석을 옮겨주는 정도일거라 예상되었다. 매일 비행기가 여러대 뜬다면 가장 빠른 비행기를 탑승할 수 있겠지만, 하루에 하나 뜨는 비행기이니 꼼짝없이 하루를 마닐라에서 더 머물게 된다는 계산이 나온다.

새벽 2시 40분에 출발 예정인 비행기 카운터가 열리려면 적어도 11시 반은 지나야 할 터. 어짜피 마닐라에 머물러야 한다면 공항에서 주구장창 기다리느니 빨리 티켓을 받고 숙소를 찾는 것이 낫다. 전화로 비행기 연장을 하려다 실패. 카운터가 열리기를 기다리느니 에어 아시아 오피스를 찾기로 했다. 심지어 에어 아시아 오피스는 터미널 3가 아닌 터미널 4에 위치해 택시를 타고 이동해야 했고, 오피스에서도 발권은 되지 않아 터미널 4에 있는 국내선 카운터까지 들어가는 우여곡절 끝에 발권을 받았다. (하염없이 터미널 3에 앉아 기다리는 사람들을 보며 위안을 얻었...)

그와 동시에 다른 친구는 스마트폰 앱으로 호텔 예약을 진행했다. 밤 12시가 넘어서 체크인을 하더라도 일반적인 호텔은 체크 아웃 시간이 오전 11시. 태풍이 지나간 날 11시에 체크아웃해서 하루종일 관광을 한다는 건 체력적으로나 환경적으로나 불가능해 보인다. 몇 시간 연장 하느니 하루 더 숙박하는 것이 낫겠다 싶은.. 총 숙박 시간은 정확히 24시간이었는데, 2일치 요금을 내자니 아까웠지만 다른 방법이 없다. 

호텔을 선택하는 것도 신중해야 했다. 혹여 비바람으로 인해 밖에 돌아다닐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런 경우 호텔과 쇼핑몰이 붙어 있는 곳이 편하다. 사실, 최고의 장소는 마닐라 공항 바로 앞 리조트 월드 마닐라에 붙어있는 '래밍턴 호텔'이다. 먹거리 놀거리와 카지노까지 붙어있는 호텔이니 하루종일 실내에 있어도 된다. 그러나 역시나 래밍턴 호텔은 이미 방이 남아있지 않았다. 캔슬된 비행기가 우리 비행기 뿐만은 아닐터이니.. 카지노에 메리어트와 맥심 호텔도 붙어있지만, 이 호텔들은 우리가 2박이나 숙박료를 내고 머물기엔 너무 고가였다.   

그때 떠오른 곳이 바로 '이스트 우드'. 공항에서는 꽤 거리가 있지만 어짜피 하루 숙박을 해야하니 시내로 들어가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싶었고.. 이곳의 '리치몬드 호텔'은 감당 가능한 가격에 2층이 쇼핑몰과 연결되어 있어 실내에서 내내 보내도 불편함이 없는 곳이었다. 예전보다 가격이 조금 올랐지만 지불할 수 있는 가격이었고, 다행히 방도 있어서 재빨리 예약! 약 1박 2일을 머무르면서 이 호텔을 선택하길 정말 잘했다는 생각을 내내 했다.

호텔에 숙박하는 내내 창밖에는 바람소리가 거셌다. 물론 그런 소리에도 아랑곳없이 나와 친구들은 느지막히 일어나 조식을 먹고 또 한숨 눈을 붙이고 점심 때가 되어서야 밖으로 나섰다. 가늘게 빗방울은 떨어지지만 다행히 태풍은 지나간 모양이었다. 그런데 마닐라에서도 계획된 도시라 깔끔하고 화려했던 이스트우드의 풍경이 생소했다.

가지가 꺾어진 야자수, 뿌리째 쓰러진 나무들이 사방에 널려져 있고..
건물 외벽에서 벗겨져 나온 자재들로 바닥은 난장판이었다.
조각나서 더욱 애처로와 보이는 간판..

휘거나 사라져버린 이름들..

태풍 람마순은 그렇게 마닐라를 휩쓸고 지나갔다. 튼튼히 건물을 세워놓은 계획 도시인 이스트우드의 피해가 이 정도이니 다른 지역은 알만했다. 그런데 필리핀 사람들은 이른 아침부터 늘상 있었던 일처럼 태풍의 흔적을 치우는 손길로 바빴다. 저녁 무렵이 되자 이미 이스트우드의 대부분은 복구 된 듯 보였다.

언젠가 한 필리핀 사람이 그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었다. 매년 수차례의 자연 재해를 온몸으로 맞으며 왜 신이 이런 가혹한 시련을 주는지를 기도하며 묻는다고. 만일 이런 재해가 없었더라면 조금 더 빠르게 발전할 수도 있는 나라일 거라고.. 그 이야기를 조금은 더 실감하게 된 듯 했다.

또 한 번의 잊지 못할 기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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