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리버 여행기'를 모르고 자란 사람이 있을까? 손으로 들고 직접 읽어보지 않았더라도, 그가 여행해 봤다는 소인국이며 거인국 이야기는 상상력을 자극하기에 충분한 소재이다. 그렇지만 '모두다 아는 이야기'를 소재로 만드는 영화는 어느 정도의 위험부담을 안고 있다. 일단 발전한 기술력으로 인해 기존에 보아왔던 영화보다 좀 더 리얼하게 소인국과 거인국 사람들을 보여줄 수 있겠지만, 그렇더라도 뻔히 아는 이야기들을 새롭게 느끼게 만들 수 있는 아이디어는 필수적이다.
그래서 아마도 감독은 주인공을 '잭 블랙'으로 낙점했을 것이다. 사실 그렇다. 나도 다른 그 누가 걸리버 역할을 맡아서 한다고 했더라도 그닥 관심이 없었을텐데 잭 블랙이기 때문에 보아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된 것이다. 어짜피 걸리버 한 사람의 원맨쇼를 봐야 한다면 잭 블랙의 원맨쇼인 것이 최선이니까.

그렇지만 뚜껑을 열고 본 걸리버 여행기, 특히 3D를 선택했던 것은 대단히 큰 실수였다. 원래 영화를 보고 나서 '돈 아까워~'라는 기분이 들면 실패인데 3D는 가격이 배로 비싸니까. 아마도 2D로 봤다면 이렇게까지 돈 아깝다는 생각이 안 들었을지도 모르는데.. 그러니 일단 보실 분들은 2D를 추천한다!
** 자 그럼 이제부터 스포 나갑니다. 보실 분들은 과감히 창을 닫아주세요!
걸리버 여행기의 장단점들
1. 지루하지 않다, 대신 개연성이 없다
영화는 고작 87분이다. 요즘 나오는 영화 치고는 지극히 짧은 시간이며, 오히려 영화 전 본 광고들이 훨씬 길게 느껴질 정도였으니까. 속도감도 있고 쉴새없이 에피소드가 진행되는 통에 깜빡 졸 여유는 없는 것이 장점이다. 대신에 싹둑 잘라버린 감정선들이나 이야기의 개연성의 문제가 곳곳에서 노출이 되며 몰입을 방해한다. 걸리버가 거인국에 있을 때 소인국 절친 '호라티오'가 어떻게 거인국까지 가게 되었는지.. 걸리버가 5년간 짝사랑해 온 달시가 그가 고백 한마디에 좋다고 마음을 받아주는 거라든지.. 그렇게 싹뚝싹뚝 잘라버린 편집 때문에 영화를 보는 내내 쌩뚱맞다는 느낌을 몇 번이나 받았다.
2. 패러디의 웃음, 그런데 그 영화들은 봤니?
걸리버 여행기의 곳곳에 수많은 영화와 음악 등 미국 대중문화 패러디 장면들이 등장한다. 물론 나는 타이타닉을 봤지만 스타워즈를 보지 않았다. 스타워즈 광팬인 남친 때문에 그나마도 스토리나 등장인물의 이름을 알지만, 그런 걸 전혀 모르는 사람이라면 뭔소리야 하고 넘어갔을 장면들이 등장한다. 소인국 절친 '호라티오'가 공주에게 고백하게 만드는 장면에서는 어떤 팝음악의 노래 가사를 읊었는데, 나는 전혀 모르는 노래라 그닥.. 곳곳에 드러나는 그런 미국적인 패러디들은 아는 사람만이 즐길 수 있는 그 무엇의 한계일 것이다.

3. 웃음이냐 교훈이냐 모험담이냐
걸리버 여행기를 한 마디로 요약하자면 명언(?) 한마디로 축약이 된다.
"There's no small jobs - just small people"
사실 많은 영화들은 웃음과 감동을 모두 주고자 노력을 하고 이 영화도 다르지는 않다. 87분을 내내 그 교훈 한 마디를 위해 모험도 하고 웃음도 주는데(이 영화의 장르는 코미디, 모험으로 되어 있다만..) 지나치게 친절하고 진부하다. 딱 자녀의 손을 붙잡고 가서 보고 극장 밖을 나서면서 "저 봐라, 다 자기 하기 나름인거다.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거란다"라고 말해야 할 것 같다고나 할까.
처음 슈렉을 봤을에도 '외모가 전부는 아니다'라는 교훈은 담겨 있었지만, 극장에서 나올때는 '그래! 외모는 전부가 아니야!'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와, 기발해. 어떻게 그렇게 꼬아서 패러디를 했지? 아~ 진짜 한참 웃었네' 정도였던 것 같다. 그리고 그 비슷한 걸 기대했는데, 대체 이 영화의 정체는 정말 '아동용' 영화에 한정되었던 건지. 아쉽고 또 아쉽다.
4. 3D로 만들면, 뭐가 달라?
요즘 영화들, 멍멍이나 음메나 3D가 대세다. 덩달아 영화 가격도 두 배 가까이 올라간다. 얼굴에 맞지도 않는 안경은 영화를 보는 내내 흘러내리거나 귀 근처 머릿부분을 눌러 괴롭힌다. 기존에 안경을 쓰던 사람들은 안경+안경이라는 불편함을 호소한다. 그러면 3D이기 때문에 더 재미있고 실감나야 한다. 하지만 실상 그런 영화들은 지극히 드물다.
만일 어제 내가 3D로 봤기 때문에 그나마 재미있었던 거라고는 이야기 하지 말자. 그러면 더한 악평이 쏟아져야 마땅한 영화니까. 과도기이기 때문에 그러려니 하지만서도.. 3D 만들 시간에 스토리 보강하고 더 디테일하게 편집이나 하시는 게 어떨까하는 생각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5. 그럼에도 이 영화를 봐야한다면?
잔인하지도 무섭지도 야하지도 않은 이 영화는 명절 연휴 아이들 데리고 나가서 보기에는 딱!이다.
아이들의 상상력을 자극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머리 비우고 아무 생각없이 편하게 볼 영화로도 딱!이다.
사람이 사람을 왜 사랑하게 되는지 관심없다면 금상첨화!
잭 블랙 하나로 만족할 수 있다는 팬이 보기에도 딱!이다.
그의 흔들리는 뱃살의 매력에 풍덩 빠질터이니..
소인국 사람들이 얼마나 대단한 architect인지 궁금한 사람들도 봐도 괜찮다.
하지만 그들이 노래 한 곡으로 평생을 해오던 전쟁을 멈추는 단순한 사람들이라는 것에 조금 놀랄 것이다.
미국 대중문화에 빠삭한 사람들에게는 어쩌면 폭소 터지는 영화가 될지도 모른다.
이건 정말 '어쩌면'이다....




덧글
칼슈레이 2011/01/28 19:31 #
미친공주 2011/01/28 20:52 #
SlowS 2011/01/29 02:25 #
3d는 그냥 컨버팅만 하면 되는데 그게 비용이 많이 드는 것도 아니라서 제작사가 최근 무조건 사항으로 민다고 하더군요.
저비용에 고 티켓값이니까요. 저번에 모라디오 모평론가의 말에서 얻은 정보에요.
쏘 2011/01/29 02:35 # 삭제
soup 2011/01/29 05:10 #
Reverend von AME 2011/01/29 09:02 #
전 개인적으로 그런 트리오를 한꺼번에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뛸듯이 기뻤습니다. 같이 본 파트너(Scottish/Irish) 도 역시 그 문화를 잘 아는 터라 즐겁게 봤고요. 영화 자체는 결국 단순해질 수 밖에 없는데 거기에 여러가지 패러디랑 (저는 KISS 기타히어로 무대가 가장 반갑더군요 ㅋ) Chris 의 엄청난 연기력이 제대로 어우러져서 잘 만들어진 영화라고 생각됩니다.
또한 제가 반가웠던 건 영화에 쓰인 곡의 선정인데... 여러가지 rock 넘버들이 있었지만 특히 마지막의 War - what is it good for? 같은 경우 정말 잘 선택한 곡이라고 생각되더군요. KISS 의 I wanna Rock'n'Roll all nite 같은 경우엔 뭐 말할 필요도 없죠. ㅎㅎ (저흰 이 곡 나올 때 살짝 따라부르기까지 했음)
사실 한국에 이거 개봉한다고 해서 아는 사람들한테 추천은 했지만, 과연 저런 문화의 갭이 심한 게 먹힐까 하는 우려도 좀 했었다는 -_-;;; 제가 보기엔 잭 블랙은 이게 성공하건 말건 상관없이 그냥 '재미로' 했을 거고, 나머지 역들도 그저 즐기자는 의미로 찍은 거 같더라고요. 여기선 개봉하기 몇달 전부터 영화관 preview 를 그냥 트레일러가 아니라 Orange (모바일 회사) 광고 식으로 찍어서 더 웃겼다는 ㅎㅎㅎ (http://www.youtube.com/watch?v=LNMWgmvdLws)
아참, 덧붙여서 저도 개봉일날 바로 봐서 3D 밖에 없었는데 - 나중에 되니 3D+2D 로 같이 상영하더라고요. 한국도 좀 기다리면 선택권이 생길지도.?
+
주요 cast 중 두명이나 Scotland/Ireland 출신이라 그랬는 지는 모르지만 필름 촬영지가 영국 Hampshire 지방의 Aldershot 이라고 하더군요. 릴리풋 왕궁의 경우 Blenhein palace 라는데 어디 붙은 건 지는 잘...
켈빈 2011/01/29 10:12 #
절망한 영화입니다.. 휴..
여지껏 영화보면서 오글거리긴 난생처음이네요.. 정말 딱 초등학생 조카랑 보러가긴 좋은영화입니다.
Reverend von AME 2011/01/29 10:21 #
영화 안에 녹아있는 개그요소나 문화적 요소를 모르면 좀 감상이 힘든 영화죠. 개인적으로는 그런 이유로 차라리 15금 정도여야 마땅하지 않나 하는 생각마저 들더군요. 확실하게 애들용 영화는 절대 아닌 거 같아요.
켈빈 2011/01/29 13:58 #
친구랑 조조로 영화를 보러갔는데 초등학교3~4학년쯤 되는 아이들이 참 많더라구요~
저딴에 민망했던 장면들이 아이들한테는 재밌었는지 빵빵터져서 쓴 말입니다.ㅎㅎ
Reverend von AME 2011/01/30 00:30 #
전 개인적으로 포탄을 뱃살로 되쏘아 올린 씬이 가장 웃겼다는..ㅎㅎㅎ
더카니지 2011/01/29 11:00 #
그러고 보니 그린 호넷 3D도 좋지 못한 소리를 듣고 있는 걸로 봐서는 무분별한 3D가 좋은 건 아닌듯.
원심무형류 2011/01/29 12:40 #
다물 2011/01/29 12:55 #
Zannah 2011/01/29 14:25 #
말년승냥군 2011/01/29 14:52 #
다른 영화봐야겠네요. 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