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석하는 결혼식 횟수가 늘어가고, 그만큼 주위에 싱글들이 하나, 둘씩 사라져가면서 실감하는 것 중 하나가 '결혼식'은 어쩔 수가 없는 거라는 생각이다. 의욕만 넘치던 20대에는 다들 "나는 결혼식을 그렇게 안할거다"라고 이야길 했었던 친구들이 결국은 찍어내는 것처럼 똑같은 형식의 결혼식을 해 나가고 있기 때문이다. 누구 말처럼 막상 결혼을 할 때가 되니 결혼식의 주인공은 나이지만, 각본과 연출은 양가 부모님의 몫이라는 걸 깨닫는다고나 할까.
절친들만 초대한 소박한 결혼식, 혹은 햇살 내리쬐는 정원에서의 야외 결혼식, 파티 형식으로 자유로운 결혼식, 하다못해 휴가 기간을 늘릴 수 있는 금요일 저녁 결혼식.. 등등. 영화에서나 나올법한 결혼식을 꿈꿨던 소녀들은 이제 현실감각 투철한 30대가 되었고, 그들이 꿈꾸는 결혼식에는 더 이상 환상은 없다. 그저 큰 사고 없이(넘어진다거나) 끝나길.. 축가 삑사리가 안나길.. 결혼에 골인하기까지의 지긋지긋한 과정들을 그저 빨리 끝맺고 싶다는 마음이 앞선다고나 할까.
그런 예식의 형식에서 '주례사' 역시도 틀에 박힌 형식일 뿐이다. 물론 드문 케이스로 진짜 신랑이나 신부의 절친한 교수님이나 함께 다니는 교회 목사님 등 의미있는 분들이 주례를 봐주시긴 하지만.. 대개의 경우 적당한 주례 경력을 가진 분들을 섭외하고 비슷비슷한 당부의 말을 듣는, 신랑신부는 모르겠지만 하객들은 대개 지루하다고 귀담아 듣지 않는 것이 주례인 것이다. 그래서 최근에는 그나마도 형식을 깬답시고 주례 대신 신랑 신부 부모님의 덕담이나 신랑신부의 서약의 글로 대신하기도 하지만 그것마저도 썩- 흔하지 않다.
날씨 좋은 지난 주말, 역시나 친구의 결혼식이 있었다. 평소 다녀본 결혼식과 크게 다를 바 없는 결혼식이었다. 그러나 단지 손발이 오그라들 정도로 짜증났던 주례를 하시던 주례 선생님이 색달랐다면 색달랐다고나 할까. 물론 주례사는 하시는 분의 스타일에 따라 여러 버젼이 있기 마련이다. 아주 드물지만 맛깔나게 이야기를 잘 하시는 분 부터 교장 선생님 훈화처럼 '마지막으로'라는 말씀을 여러번 하시는 분까지.. 그렇지만 이런 주례 선생님은 처음 봤다.
주례사 한 마디 한 마디를 듣다가 짜증이 나서 심지어 친구들이 나가자고도 했던.. 그렇지만 저기 서서 듣고 있는 친구를 생각하며 꾹- 눌러 참은 그 주례사의 내용이 뭔고 하니..
자신의 주례를 듣는 이 신랑신부 뿐 아니라 하객들도 행운이란다. 이런 귀한 주례사는 쉽게 들을 수 있는 것이 아니란다.
응? 설마 웃자고 한 말씀이시죠? 그런데 어조가 너무 진지했다. 왠지 불길한 기운이 스물스물 솟는다.
자신이 주례한 부부 치고 못사는 부부를 못봤다고 한다.
그래.. 뭐, 덕담이니까. 덕담.
본인은 아침에 방송에 나가야 해서 새벽 4시에 일어난 부지런한 사람이란다.
네? 그게 신랑 신부랑 무슨..?
자신은 평생 술, 담배를 입에도 대지 않았을 뿐 아니라 노래방 한 번 안가봤단다.
썩 자랑 같게 들리지는 않는다. 꼭 술, 담배, 노래방 가는 모든 이들을 범죄자 만드는 뉘앙스.
아내가 메이퀸 출신인데, 60 넘은 자신을 아직 아기 다루듯 다뤄준단다.
뭐, 부부금슬 좋아서 좋으시겠지만.. 아내 자랑 꼭 하고 싶으셨군요. -.,-
이따금 주례를 하시는 분들의 경력이 워낙 화려하여 자화자찬을 하시는 분들이 있긴 하지만, 이번에는 도가 좀 지나친듯 했다. 더구나 신랑신부와는 관계 없고, 아무도 궁금해 하지 않는 본인의 이야기를 줄줄 늘어놓는데.. 에휴. 말의 내용 뿐 아니라 말투도 문제였다. 전형적인 설교형 말투였는데, 그것이 말의 내용과 합쳐져 더욱 거만한 느낌을 주는 것이다. 그러다가 이런 신랑, 이런 신부가 되어서는 안된다는 당부의 말을 할 때에는 소리소리 지르며 열변을 토하시는 바람에 서 있는 신랑 신부가 이미 큰 죄라도 지은 것같은 느낌을 받게 만들었다. 좀 너무하시네요..
원래 주례사의 시작은 결혼이라는 경험을 미리 해본 어른이 당부하는 말에서 시작되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개인이 경험한 결혼이라는 형태는 사람마다 너무 다르고 본인이 옳다고 생각하는 결혼생활 또한 본인과 배우자 두 사람이 맞춰가며 만든 것일 뿐, 그것이 보편 타당하게 옳은 것은 아닐 수도 있다. 그래서 타인의 결혼에 대해 조언을 할 때는, 특히 주례 같은 중요한 자리에서 이야기 할 때는 더욱 신중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본인이 주인공이 아닌데 본인의 이야기와 자화자찬을 늘어놓거나, 본인의 결혼생활방식만 옳다는 투로 이야기 하는 것, 특히 이렇게 살면 안된다고 소리소리 지르는 것은 썩 듣기 좋은 주례가 아니었다. 그럼에도 주례 경험이 아주 많으신 듯 하니.. 더욱 스스로의 주례 방식이 옳다고 생각할 터였다. 참 안타깝기 그지 없다.
그러고 보니 참 결혼식이라는 게 어렵다. 주례사라고 내가 듣고 싶은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건 아니고, 원하는 분을 꼭 모실 수도 있는 게 아니니.. 생판 모르는 남에게 어이없는 당부의 말을 듣느니 차라리 부모님의 덕담을 듣는 것이 훨씬 나을 것 같은데 왜 우리나라 결혼식의 형식은 20세기의 그것에서 크게 진화하지 못하고 있는 건지 알 길이 없다.




덧글
2011/04/25 14:20 #
비공개 덧글입니다.미친공주 2011/04/25 14:33 #
떠리 2011/04/25 14:55 #
소도둑 2011/04/25 15:41 #
2011/04/25 15:55 #
비공개 덧글입니다.ALICE 2011/04/25 16:12 #
저는 나중에 제가 결혼할 때 주례 부탁드리고 싶은 분이 있는데, 쉽지 않네요...ㅜㅜ
결혼이라는게 결국 두 집안이 합의해서 하는 것이 되더라구요.
미친공주 2011/04/25 16:24 #
키세츠 2011/04/25 16:14 #
저도 어느 분 모셔야 되나 꽤나 고민했었는데 결과적으로 잘 되어라 해피 엔딩...
글에 나온 부부는 쪼~~끔 그랬겠네요.
미친공주 2011/04/25 16:24 #
D백작 2011/04/25 18:01 #
미친공주 2011/04/25 18:46 #
한얼 2011/04/25 18:59 #
미친공주 2011/04/25 19:03 #
쥐나 2011/04/25 20:50 #
갈수록 낭만은 없고 뿌린 돈 거두는 형식적인 행사가 되고 있어 씁쓸해요.
미친공주 2011/04/26 09:12 #
Gweny 2011/04/25 22:38 #
거기다 가끔 장가 못간 녀석들 팔아주시려고 노력도 해주신답니다. :)
미친공주 2011/04/26 09:13 #
지나가다 2011/04/25 23:31 # 삭제
미친공주 2011/04/26 09:13 #
minci 2011/04/25 23:58 #
풀타임이면 왠지 신혼부부가 불쌍해요..
결혼식날 무슨 봉변이야..;;
미친공주 2011/04/26 09:13 #
Cloudia 2011/04/26 05:07 #
미친공주 2011/04/26 09:13 #
수룡 2011/04/26 05:23 #
미친공주 2011/04/26 09:14 #
뭥미 2011/04/26 11:39 #
자격지심에 컴플렉스 덩어리만 모였나 주례하는데 할 얘기가 저 따위뿐이라니 놀랍네요.
댓글들도 보니 진짜 후덜덜하네요 ㄷㄷㄷ
저는 결혼할 때 주례해주신 분이 초심을 잃지 말라며 신입사원의 자세에 대한 얘기를 해주셨는데
지금 보니 정말 주옥같은 주례였나봐요 ㅋㅋㅋㅋ
그땐 신랑신부 신입사원 될 기세여서 조금 웃겼거든요.
미친공주 2011/04/26 13:09 #
박하설탕 2011/04/26 14:10 # 삭제
미친공주 2011/04/26 15:08 #
HODU 2011/04/26 16:35 #
친구들이 잘했다고 너 저 주례 안듣길 잘했다고;;;
내용이 결혼얘기와는 상관없이 국제정세, 중동, 전쟁, 기아일색이었다는데
그나마 하신 결혼얘기는 결혼하는사람은 저주를 받는것이고 저주를 푸는것은 죽음밖에 없다고한것밖에 없었다는군요...
애들이 그런 스펙타클한 주례사는 처음들어봤다며....
미친공주 2011/04/26 16:54 #
불주먹 2011/04/26 17:50 #
4월이야기 2011/04/28 10:45 # 삭제
다만...매우 길거라고 예상했는데 생각보다 짧았던(5분) 기억과
두 부부는 반드시 노블리스 오블리주를 실천해라...라는 말밖에는 기억이 안납니다.
주례선생님께서 왜 노블리스 오블리주를 말씀하셨는지는 모르겠지만
나중에 저희 부부가 사회지도층이 될 것 같다는 생각을 하셨을까요?ㅋㅋ
미친공주 2011/04/28 13:5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