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우영의 초한지 VS 샐러리맨 초한지 활자이야기

일전에 말씀드린 적이 있듯, 제가 요새 푹 빠져있는 드라마 중 하나가 샐러리맨 초한지입니다. 초한지라고 하면 항우와 유방 정도의 이름만 간신히 알던 저에게 번쾌니 항량이니 범증이니 하는 생소한 이름들을 낯익게 만들어준 것도 바로 이 드라마죠. 제가 생각하는 드라마의 긍정적인 효과 중 하나가 바로 이 부분입니다. 초한지를 뒤틀어 리메이크 한 이 작품 덕분에 제가 초한지를 읽게 되었거든요. 물론, 도저히 소설은 읽을 엄두를 못내고 만화 고우영의 '초한지'로 읽었지요.

고인이 되신지도 꽤 오래되었지만, 삼국지를 비롯해 연산군, 오백년까지 독파하면서 정말 대단한 분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약간 성인버젼이기는 하지만 만화로 가볍게 터치하여 어려운 역사를 쏙쏙 이해하기 쉽도록 풀어놓았거든요. 사실 만화를 읽는 사람이야 스르륵~ 읽으면 그만이지만, 그렇게 쉬운 만화를 그리기 위해서는 수많은 역사책을 탐독하여 머릿속에 물 흐르듯 그려낼 수 있어야 가능한 법이니까요.

고우영 화백의 여러 역사 만화를 탐독하면서도 여태 초한지를 읽지 않았던 것은, 그만큼 초한지가 어렵게 느껴졌기 때문일 겁니다. 그러나 '샐러리맨 초한지'라는 드라마 한 편이 저를 완전히 바꿔놓았지요. 물론 이 만화를 읽으면 수많은 등장인물 때문에 정신이 살짝 혼미해지긴 합니다. 그러나 드라마에서 접했던 등장인물의 이름 몇 개만으로도 훨씬 수월하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게다가 드라마와 비교하며 읽는 재미까지 더해지니, 더없이 재미있게 읽을 수가 있었지요.

고우영의 초한지에서는 유방이 꽤 나쁘게 그려집니다. 본인이 갖춘 능력은 없으나 워낙 인복이 많았고, 타고난 운이 워낙 좋아 결국 천하를 제패하는 인물로 그려지지요. 허허실실한 느낌이랄까요. 얼추 드라마 속의 느낌도 그와 비슷합니다. 유방 개인이 갖춘 능력은 썩 없지요. 중반을 넘어서면서 장량의 도움을 많이 받고 있는데, 역사 속에서 장량은 유방의 최고의 지략가였습니다. 한신은 유방이 가진 최고의 장군이었지요. 한신은 드라마 속에서 너무 멋지지 않게 그려지고 있지만, 항우 밑에서 능력을 인정받지 못하다가 유방 쪽으로 가서 인정받게 되는 설정은 비슷합니다.

드라마 덕분에 유심히 본 것은 러브라인입니다. 특히 드라마에서 여치가 너무 매력적으로 그려지는 바람에 어떻게 나오나 싶었지요. 그런데 썩 많이 등장하지는 않더라고요. 그래도 유심히 보게 됐는데, 성격이 대차고 강단 있는 소위 '깡' 있는 여자로 그려집니다. 여자를 밝히는 유방을 꼼짝 못하게 한 듯 보였어요. 항우를 속이기 위해 술, 여자, 도박에 손을 대는 베르사유 버전의 유방이 생각이 납니다. 

고우영의 초한지에서 항우는 유방보다 훨씬 멋있게 그려집니다. 타고난 장수 기질에 너무 대가 곧아 부러지는 법을 모르죠. 그런 그의 성격 때문에 유방 측의 계교에 여러 번 속습니다. 드라마의 항우는 정정당당한 방법을 쓰는 사람은 아니지만, 여전히 매력적으로 그려집니다. 솔직하게 자신의 성격을 드러내는 타입이 역사 속의 항우와 꽤 통하는 느낌입니다.

항우의 아내 우희는 우미인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드라마 속에서는 귀여운 내숭으로 항우를 꼼짝 못하게 만들고 있지만, 전쟁에 패한 항우가 도망가는데 자신이 방해가 될 거라고 생각하며 스스로 자결을 할 만큼 두 사람의 애정이 뜨거웠었죠. 두 사람의 로맨스는 패왕별희라는 경극으로 그려질 만큼 애틋했습니다. 역시 만화 속에서는 많이 등장하지는 않아요.

범증은 항우 쪽의 최고의 지략가입니다. 범증이 모가비 회장을 마음에 두고 있는 드라마의 설정은 역사 속에 존재하지 않지만, 드라마를 재미있게 만드는 요소 중 하나죠. 고우영의 초한지를 보면서 항우 때문에 여러 번 가슴을 치게 되는데, 그게 바로 항우가 범증의 말을 잘 듣지 않기 때문입니다. 항우는 범증이 몇 가지 계교를 내놓으면 적에게 그런 술수를 써서 이겨야 할 만큼 자신이 나약하지 않다며 큰소리를 치는 사람이었죠. 마지막에는 자중지란으로 두 사람이 결별을 하게 되는데, 드라마에서도 그렇게 그려질지 궁금합니다.

드라마 샐러리맨 초한지에서 중반까지 가장 이슈가 되었던 건 '모가비'의 정체였습니다. 실제로 모가비라는 이름은 역사상에 존재하지 않거든요. 그러나 곧, 모가비는 진시황의 환관 조고라는 사실이 밝혀졌지요. 만화에서도 등장하는데 진시황이 죽자 우둔한 아들을 왕으로 세워 향락에 빠지게 버려두고 전횡을 휘두르며 권력을 만끽했던 인물입니다. 환관 조고와 모가비의 미묘한 오버랩이 무릎을 탁! 치게 하지요.

조고의 시대는 그리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드라마 속 모가비의 시대도 그렇네요. 비서실장으로 유능했던 모가비는 회장의 자리를 감당할 그릇이 못됐습니다. 사치와 향락에 빠져 제대로 현실을 보지 못하는 그녀의 모습에서 조고처럼 축출될 거라는 예상을 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지요.

그 밖에도 소하니 팽월이니 낯익은 이름이 등장할 때마다 "아하~! 아하!" 새로운 눈으로 읽게 됩니다. 샐러리맨 초한지를 재미있게 본 분들에게 권하고 싶네요. 아이들이 읽어도 괜찮으냐고요? 다른 고우영의 만화에 비해 수위는 낮은 편이지만 너무 어린 아이들이 읽기에는 여전히 어렵지 않을까 싶기도 하네요.


덧글

  • 엘러리퀸 2012/03/06 21:37 #

    고우영의 초한지에서의 유방은 좀 안 좋은 쪽으로 나온 것 같지만(실은 만화를 못 읽어서..ㅠㅠ)
    원작이 나올 당시에는(그리고 현재의 다른 어느 쪽에서도..) 이상적인 군주형이었지요. 능력은 없지만 인덕이 있고 사람을 한번 믿으면 제대로 쓰는 그런 유형의 군주 말이지요.천하 통일 후 '다다익선'이라는 고사로 유명한 한신의 평이 잘 찝어냈다는.. ㅋ(그런데, 요새는 능력이란 것이 중점이 되면서 특히 까인다는..--;)
    이런 군주형을 제대로 구현한 인물이 삼국지연의(정사 아님..--;)의 유비입니다. 덕분에 현 시대에서 유비까가 생기는 큰 요인이 되고 말았지요..--;
  • 미친공주 2012/03/07 09:16 #

    이상적인 군주를 꼬아 표현했을지도 모르지만 천하를 제패한 후 한신을 제거해버리는 걸 보면서 ;;;무서운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러니 한나라를 세웠겠죠?
  • 엘러리퀸 2012/03/07 21:38 #

    역사적으로 토사구팽이란 것이(이게 한신의 고사에서 나왔지요. ㅋ) 성공한 군주들의 종특인지라..(유방은 약과지요. 주원장 보면 진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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